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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진리

6,042강 축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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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2강

축원이란

 

우리가 축원이 뭔지 알아야 한다. 국민들이 축원하는 것은 자기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축원하는 원리를 바르게 알고 친구가 잘 되게 해달라는 것도 축원이다. 잘 되게 해달라고 할 뿐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축원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서 산다는 이런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서 하다가 동네를 위해서 축원을 한다.

 

그러면 동네를 위해서 살아나가는 버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축원을 하면 나라를 위해서 다듬어 가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축원을 한다고 해서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은 어떻게 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바램이 우리 국민이 다 같이 그렇게 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문제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하면 크게 영향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시민들이 같이 시가 잘 되게 해달라고 축원을 하고 있다면 시가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문제가 달라진다. 축원은 자신을 다시 끌어올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만 축원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위하다가 주위를 위하다가 이렇게 해서 주위가 커진다.

 

이렇게 축원이 꼭 이루어진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축원을 하는지 화두가 만들어진다. 자기 화두이다. 사회에 축언을 하면서 축언을 몇 달 동안 100일 정도 축언을 하고 난 뒤에 이웃사람에게 신경질을 내면 어떻게 되는가? 축언을 사회를 잘 되게 해달라고 축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축언을 하면서 자기를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 축언을 하면 사회를 사랑해야 하고 사회를 품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앞에 사람에게 짜증을 내던 것이 짜증이 없어지고 사람들을 존중하게 된다.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다. 사회만 존중한다고 해서 존중이 되는가?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할 때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 된다.

 

나라를 위해서 축언을 한다고 하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땅덩어리는 가만히 나두어도 된다. 축언을 안 해도 된다.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축언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축언을 하면서 주위에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축언할 자격이 없는데 계속 축언을 하면 행동이 뒷받침이 안되기 때문에 두들겨맞는 것이다.

 

생활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생활도이다. 축언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축언을 한다면 가족을 아껴들어가기 시작하는 본성이 되어 주어야 한다. 종교단체에 가면 축언을 전부다 해준다. 축언을 해줄 때 사람들을 위해서 축언해주는 종교지도자들이 된다. 목사님들이 집회가 끝날 때 기도를 해준다.

 

그렇게 기도를 해주고 신도들이 돈을 안 가지고 오면 혼을 낸다. 돈도 안 내면서 힘들게 하면 안 되게 해달라고 축언을 할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만 잘해달라고 하던지 앞에서는 다 잘 되게 해달라고 하고 돈 안 가지고 오는 자는 옆으로 미워하고 이렇게 하면 두들겨 맞는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0.1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인간이 비트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무수한 어떤 일들이 생기는 것이 자신이 비트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하고 싸우는 것이다. 자연하고 싸우고 게임을 하면 100% 진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몰라서 바르게 행동하지 못해서 겪고 있는 일들이 우리가 어려워지고 있는 일들이다. 우리가 축언을 할 때는 자신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한테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100일을 하던지 1년을 하던지 정법 공부를 하면서 축언을 하면 주위를 아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위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참 좋은 것이다. 어디에 든지 가서 비는데 산에 가면 산에서 빌고 돌에 가면 돌에 빌고 물에 가면 물에 빌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축원을 할 때가 있고 예우를 갖출 때가 있다. 산에 가면 산에서 축언을 많이 하기보다는 예를 갖추는 것이 좋다. 그래서 사회에 살면서 여러 가지 환경을 가지고 산에 가면 산에 중간쯤 일을 보러 가서 예를 처음에 산에 들어갈 때 갖추지도 않고 축언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원리가 있다.

 

우리가 법원에 갈 때 법원을 관장하는 대신들이 있다. 우리가 법원에 들어갈 때 법원 입구에서 ‘이 사람이 뭔가를 잘못했는지 잘 다스려주십시오.’하고 들어간다. 일이 술술 풀린다. 그런데 천지도 모르고 법원에서 오라고 한다고 해서 막 들어가면 막힌다. 생각한 것들도 말이 안 나온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예를 갖추고 축언을 하고 들어가면 일을 보면서 일이 술술 풀리고 말도 저절로 나오고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모르고 못 쓰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산에 들어갈 때 자연 속에서 관장하는 대신들도 같이 가는 것이다. 우리가 관공서에 갈 때도 예를 갖추고 가는 것이 좋다. 절에는 왜? 가는지 근본을 알고 가서 얻어와야 하는 것이다. 절에서 그냥 기복하고 무릎을 꿇으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도량에서 무엇을 하러 왔는가? 를 알고 가야 한다.

 

우리가 절에는 깨달음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서 간다. 깨달음이 큰 지혜가 열리는 깨달음은 욕심이다. 깨달음은 작은 것 하나라도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이다. 뭔가 우리가 하나하나 배우려고 하면 상을 주는 것이다. 교회를 갈 때도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무엇을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인가?

 

무엇인지 모르고 잘 되게 해달라고 하면 잘 되게 해주는가? 교회에 왔다면 모르는 것을 목사님이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를 가지고 모르던 것을 가르쳐주면 보람이 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일꾼이니 목사님이 나를 일깨워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돌아오는 것이 교회이다. 절에는 스님이 깨우쳐주면 감사한 것이다.

 

이것 또한 하늘의 일꾼이다. 스님한테 감사하고 하늘에 감사하고 도량에 감사하다는 예를 갖추고 나오면 된다. 거기서 기복을 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려워서 가는 것은 몰라서 잘못 살아서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라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으러 나가면 된다. 10-20년 동안 붙들고 있으면 인생을 망친만큼 그 사람도 문제가 된다.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가르침을 주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망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길게 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 풀리는 것이고 너무 길게 가면서 가르침을 못 받고 있으면 에너지 질량이 떨어져서 이제부터 담금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못 일어난다. 공부를 하는 것이 최고이다.

 

무엇을 해도 공부를 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고 공부하는 속에서 서로가 도움 될 수 있는 인연들을 만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축언 같은 것도 앞으로 공부를 해서 왜 하는지 합리적으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면 무엇을 어떻게 잘해줄까? 몰라요. 무조건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무식한 축언을 하늘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사회를 공부하고 보니 조금이라도 뜻을 보태야겠다. 힘으로는 어떻게 못하지만 하늘에 비는 것이라도 해야겠다고 한다면 이런 것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보면 질량을 갖추게 되고 갖춘 만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에서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