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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생활속

6.071강 모순이 고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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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1강

모순이 안 고쳐진다

 

문-일방통행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이 불만을 토로한다. 내가 예전에 잘난척하던 것하고 요즘에 새롭게 잘난 척이 변질이 된 것 같다. 내가 음식을 다루는데 국적불명의 음식을 잘한다.

 

우리의 삶 중에는 여러 삶이 있는데 사자삶이 있고 사자짓을 하는 삶이 있다. 내가 교과서 역할을 하는 삶이 있고 내가 뭔가 얻어 가는 삶이 있다. 내가 못난 모순을 가지고 그대로 살면 사자짓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끝이 안 좋다. 길게 가면 안 좋다. 사자짓도 한 번씩 하는 것은 괜찮다.

세상에 살면서 사자도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대 맞아야 할 때는 때려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때리는 것이 마냥 좋은가? 때리고 나면 나는 욕을 얻어먹고 살아야 한다. 욕을 얻어먹다가 보면 욕을 얻어먹기 싫어져서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깨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모순을 가지고 그냥 산다면 사다 짓을 하고 사는 삶을 우선에 살 것이다. 그런데 교육을 받아서 알고 보면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 사다 짓을 하는 것이다. 사자짓도 모르고 할 때가 좋은 것이다. 알고 나면 힘이 든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자꾸 안 된다면 특단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나도 누구처럼 복을 받으면서 살고 싶은데 이런 것을 공부를 해서 우리가 하나씩 노력을 해서 바꾸어 나갈 때 너의 노력이 여기서 틀어주어도 괜찮겠다고 할 때 바꾸어 주는 인연을 만나게 해서 틀어 가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는 인연을 주지 않는다. 척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력이 어느 정도인가? 네가 가진 조건에서 30%를 하는 것이 노력이다. 만약에 30%를 노력하지 않으면 바꾸어 주지 못한다. 인간이 노력하는 것은 30%만 하면 된다.

30%에 도달하면 너의 길을 틀어주고 인도를 해준다. 네가 70%를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에 100일 정성으로 노력을 한다면 네가 30일 정도 노력하는 것을 지켜본다. 네가 노력하는 것이 보일 때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틀 정도 기도를 하고 난 뒤에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과거에는 1일 기도를 해도 성불을 주었다. 지금은 2일을 해도 안 준다.

100일 기도를 하면 엄청난 성불을 준 것이 그때는 우리가 많이 모자랄 때라서 성불을 많이 준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키워온 것이다. 키운 것을 어떻게 키웠는가? 많은 것을 접하면서 지식을 갖추게 하면서 키워온 것이다. 지식을 다 갖춘 시대가 되어서 어떻게 하는가?

지금부터는 잘못한 것을 1일 기도를 해서 풀어주는가? 안 풀어준다. 7일 기도를 해도 안 풀어준다. 얼마를 해야 하는가? 기본이 100일 기도를 해야 과거의 1일 기도이다. 백일은 네가 노력을 해야 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100일 기도를 하는데 너를 점지해서 지켜보고 너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30%를 네가 넘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기도가 뭔가? 어떻게 해야 참기도 가 되는가? 정성이다. 정성이 기도이다. 무엇을 비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정성이 기도이다. 부처님을 따라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어서 기도가 아니고 믿던지 안 믿던지 정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네가 알던지 모르던지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노력이 기도이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것을 하고 되는가? 모르더라도 노력을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를 하면 우리가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씩 간다. 100일 동안 가려면 한 달에 한 번씩 가기 때문에 1년을 가더라도 12번밖에 못 가는 것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가면 시간이 한참 걸려야 한다. 그런데 매일 가게 되면 100일이면 끝이 난다. 절이나 교회나 도파나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산기도를 가도 그렇다. 내가 몸이 아프면 산에 꾸준히 가다 보면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가면 갈수록 가벼워지고 몸도 낫게 된다.

이렇게 되면 네가 산에 다닌 것이고 기도를 하러 다닌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정성껏 하루도 안 빠지고 간 사람은 빨리 회복이 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사람은 좀 더디게 회복이 되고 1년에 한번 가는 사람은 많이 더디게 낫는다.

교회 가는 것이나 절에 가는 것이나 스승님 공부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네가 공부가 많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정성껏 노력하는 사람인가를 보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산에 가는 사람은 자연에 너를 맡긴 것이다. 절에 가는 사람은 담당 스님한테 나를 맡긴 것이고 교회에 간 것은 나를 목사한테 맡긴 것이다.

스승님한테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스승님한테 나를 맡기는 것이다. 자연하고 스승님은 어떤 차이가 나는가? 상대가 있는 것은 상대한테 가서 내가 매일 노력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다. 정성껏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제자가 신들에게 축언을 올려준다. ‘이렇게 열심히 하니 길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제자가 축언을 올리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가 있는 대상한테 나를 맡기는 것이 똑같은 것이다. 자연에 가면 자연에서 축언을 해주지 않는다. 있는 대로 대할 뿐이다. 이것이 좀 틀린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고 기도는 정성이다. 네가 무엇이라고 비는 것은 상관이 없다. 네가 정성껏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불을 줄 때는 너한테 맞게 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정성껏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모순을 찾아도 내가 다시 또 모순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 버릇이 나와서 주장을 하고 한다는 것이다. 공부하기 전에 주장을 할 때는 천지도 모르고 했는데 공부하고 나서 주장은 기운이 더 세게 나온다.

힘을 가지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정법 공부를 하고 주장을 하면 힘을 가지고 주장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또 내가 갑질을 하는 것을 알게 되면 돌아오는 것이 쉽다. 모르고 하면 못 돌아온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런 것을 조금씩은 해도 되는데 내가 찾았다면 빨리 돌아서는 노력을 한다. 나를 고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있다. 어느 정도 노력하는 것을 보면 길을 열어주고 이끌어주고 이렇게 해서 잡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