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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진리

3042강 대접받은 만큼 갚아야 한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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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2강

신의 일꾼들의 공부 (3/4)

 

내 앞에 사람에게 덕이 되게 살지 못했으므로 상대는 나한테 인연으로 시간을 많이 함께 보내고 있었는데 시간이 다 되어도 내앞에 사람에게 덕이 되게 살고 있는가? 못 살고 있어서 그 인생에게 시간만큼 내가 갚아야 하는 형국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내가 음식을 잘 정성껏 만들어주면 이것을 잘 먹고 어느 정도 질량이 자꾸 쌓이게 된다. 내가 세상에 질량만큼 일을 못하면 내가 맞는다. 병이 오고 안 좋은 일이 오고 차 사고도 생기고 하는 것이다.

누구한테 좋은 말을 듣고 정성껏 해주는데 나는 그 말을 귓전으로 들어도 나한테 에너지를 보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바르게 흡수를 해야한다. 뭔가 질 좋은 행동을 안 하면 정성을 먹은 만큼 정성이 쌓인 것이 나를 처단을 한다. 이렇게 해서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나가서 대접을 잘해주면 좋아한다. 기분이 좋아진 것들이 조금씩 양이 나한테 쌓인다. 어디에 나가서 사모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상대가 나한테 대접을 해준 만큼 이것이 나한테 쌓인다.

이것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이 질량만큼 내가 사회에 지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나를 치는데 이것이 우리한테 오는 병이다. 이것이 우리한테 오는 사고들이다.

음식도 우리가 너무 좋은 것을 찾아 먹으러 다니면서 좋은 행위를 하지 못하면 우리가 그 대신 갚아할 것은 엄청나게 크게 갚아야 한다.

우리한테 오는 돈도 이것을 바르게 쓸 줄 모르고 이것을 욕심을 내고 자꾸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분명히 나간다. 우리가 배운 것도 없으면서 돈을 계속 모으면 어느 정도 모이면 이때 바르게 못쓰면 이것을 걷어간다.

사기꾼을 보내던지 사고가 나게 하던지 차를 받치게 해서 나가게 하던지 자식들이 사고를 쳐서 빼앗기던지 좌우지간 나간다. 나갈 때는 너를 치고 나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만 네가 욕심을 내는가? 이것을 바르게 못쓰면 그것이 나갈 때는 너를 치고 간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너무 모르고 살았다.

이런 것을 우리가 선지식이라고 하고 먼저 공부를 했다고 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곳에 가서 우리가 하나라도 배우러 가는 것이다. 바르게 배워서 내 앞에 오는 인연들과 바르게 행동하고 바른 관계를 가지고 서로한테 도움이 되도록 살면 너 희 집에는 아무 일도 안 생긴다.

자식을 어렵게 하는 것은 부모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자식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은 부모가 보기에 비뚤어진 것이고 자식은 지금 비틀어진 것이 아니다. 자기가 어려운가? 부모가 자꾸 그렇게 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이 이 자식은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는 미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환자인가? 부모가 환자인 것이다. 누구를 고쳐야 하는가? 부모를 고쳐야 자식이 바르게 돌아온다. 진단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자식을 아무리 돌려놓아도 이것은 또 비뚤어진다. 사는 패턴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이것을 아무리 치료를 해 놓아도 또 삶 속에서 패턴은 똑같아서 이 아픔이 다시 돌아온다. 삶

의 패턴을 바꾸어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몸이 아프게 살았다면 반대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 이대로 그냥 산다면 나아도 다시 병이 오게 되어있다.

우리는 병이 낫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병이 왜 왔는지 진단을 바르게 해서 근본을 뜯어고치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조금씩이라도 우리가 아픈 것을 치료를 하면 그다음부터는 아픔이 안 온다.

집안에 어려움이 왔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어려움이 온 것을 우리가 바르게 진단해서 살아야 우리가 이 어려움은 안 온다. 이것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다.

네가 살아가는 질량과 모양이 너하고 안 맞아서 상충이 생겨서 자꾸 뭔가 생기기 시작하지 않는가? 우리가 30%를 잘못 산다고 해서 우리한테 어떤 일도 안 일어난다. 3;7의 법칙 때문이다.

우리가 70% 잘못 살고 있을 때 두들기고 들어와서 ‘아야’ 이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때는 늦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좋은 에너지 70%를 가지고 태어나고 나쁜 안 좋은 질량을 30%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우리는 업이 있기 때문에 업의 질량만큼 유전인자를 그렇게 가지고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바른 것을 찾아서 열심히 살면 일생을 살아도 네가 안 다치게 되어있다. 70% 좋은 질량이 있기 때문에 일생을 살면서 조금씩 잘못해서는 평생을 사는데 70%를 다 탁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습관이 잘못되고 공부가 잘못되고 누가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잘못되고 이렇게 되면 내가 사는 습관이 잘못 들면 우리가 50%가 되어도 아픔을 느낄 수가 없다. 60% 정도가 되면 감이 온다. 어떤 일이 일어날 조짐의 감이 온다. 70%가 되면 병원에 간다든지 ‘아야’ 한다든지 어딘가에 다친다.

이때부터는 탁한 기운이 발복을 해서 내가 70%가 탁하고 맑은 기운이 30%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탁한 기운에게 못 견딘다. 이제부터는 우리한테 아픔이 한번 오면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는 금방 금방 몸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을 느껴야 하는 이렇게 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려운 것들이 다가온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안다가 오던 것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질량이 많아져서 계속 치고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우리가 한두 번 어려움을 겪으면 우리가 삶의 질량을 바꾸어 주는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이 절에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성당이나 무속인을 찾아가던지 교수를 찾아가던지 인생을 바르게 사는 원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내 질량으로 갈 수 있게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교육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기도를 하라거나 하는데 그 소리는 큰스님이 말을 안 해주어도 된다. 그 말은 녹음해서 누가 오는 대로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들려주기만 해도 된다.

뭣하게 큰스님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가? 질량이 큰 사람이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는가? 그런 소리는 초등생도 시키면 잘할 수 있는 소리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가 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가 되고 질량이 높으면 내가 원을 세워서 하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공부에는 질량이 있어야 한다. 공부는 축원한 마디가 기도이다.

하늘에 내가 축원을 하고 자연에 축원을 하고 할 때도 내가 질량이 있어야 거기에 맞게 축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식을 갖추고 사는 것이다.

우리가 바르게 사는 지식도 질량이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기초를 배우는 지식이고 우리가 사회에 나와서 공부하는 것은 70%의 우리가 사회에 기반을 공부하는 것이고 그것을 다하고 나면 선지식이 자연의 법칙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이제 인생을 바르게 빛나게 살 수 있는 지식이다.

자연의 법칙을 우리가 알아야 자연의 원리를 알아야 우리가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는 것이다. 지식을 다 배웠는데도 선지식을 찾는 이유가 우리가 원리를 모르지 않는가? 자연의 법칙을 살아가는 자연들이 우리 인간은 자연이다.

자연의 법칙을 모르고 살지 않는가?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이다. 전부다 내가 선지식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돈도 주고 따르고 하니까 다 선지식이라고 나온 것이다.

그렇게 갔는데 무엇을 가르쳐주던가? 성경에 써놓은 지식을 가지고 가르쳐주고 불경에 써놓은 것을 가르쳐주고 글자를 가지고 노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홍익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다. 홍익인간들이 어떤 삶을 사는가? 이 질량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내가 김치 봉사를 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덕행을 한 것이 되는가? 이것은 행위가 안 된다.

네가 쌀을 10말을 갖다주었다고 해서 이것이 행이 되는가? 이것은 행이 안 된다. 내가 옷을 떨어진 것을 입고 정성껏 입혀주었다고 네가 행이 되는가? 홍익인간 사회는 그렇게 해서 행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 홍익인간 너희들은 인류에 있는 지식들을 얼마나 먹고 성장을 한 줄 아는가? 지식 하나도 인류의 희생 속에서 빚어 놓은 것이다. 인류에 모든 조상들이 살면서 희생을 한속에서 지식 하나가 지적으로 만들어져서 나오는 것이다.

경제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사회에서 희생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오늘날 너희들은 인류의 문물들을 논리와 사상을 가지고 와서 다 흡수를 하고 살지 않는가? 그러면 너희들이 해야 하는 행위가 어떤 일을 해야만 이사회에 그 질량만큼 일할 수 있는 빚을 발할 수 있는 질량이 되는가? 이런 것을 생각을 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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